신입이 사수를 만났을 때
좋은 사수를 만나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그것도 모든 것이 낯설고 자신감이 바닥을 치는 신입에겐 더욱 그렇다.
1. 차근차근 하나씩
많은 신입사원들은 청운의 꿈을 안고 회사에 들어간다. 드디어 한 사람의 몫을 하게 되었다는 뿌듯함과 자신이 갖고 있는 역량을 마음껏 펼쳐 보이겠다는 꿈을 꾼다.
그런데 현실은? 음... 그냥 방해만 안되면 참 다행이다.
신입은 모든 것에 서툴다. 대학에서 배운 것은 거의 쓸모가 없다. 다 떠나서 하루 8시간을 직장에 있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걸 평생 해야한다고???'라는 절망에 빠진다. 이 때 사수의 역할은 가히 절대적이다.
첫 직장에서 만난 과장님은 속도를 늦추고 하나씩 가르쳐 주었다. 항상 미소를 띄었고 여유가 몸에 배여 있었다. 실수를 해도 웃으며 이야기해주었다. 그땐 잘 몰랐는데 나중에 내가 신입을 맞이했을 때 알게 되었다.
그것이 얼마나 복장 터지는 일이었는지.
2. 편안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내 첫 업무는 독일에서 진행되는 CeBIT이라는 글로벌 전시회에 LG전자의 Booth를 짓고 제품을 전시하고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구미공장에 있는 제품 개발자들과 독일법인, 그리고 Booth를 짓는 독일 에이전시와 일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정말로 엄청나게 많은 준비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독일 전시회 현장에 가서 Booth를 올리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제품을 담은 박스들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사람들은 영어와 독일어로 내게 뭔가를 물어보았다. 순식간에 Booth는 엉망이 되었고 나는 그것을 해결하려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형석씨, 잠깐 이리로 올래요?
가만히 나를 지켜보던 과장님은 Booth 뒤편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일단 숨을 좀 쉬어요. 그렇게 뛰어다니면 안돼. 직접 해결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시를 해야지.
과장님은 쉴 만큼 쉬고 전시장으로 나오라고 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미친듯이 숨을 가쁘게 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한참을 있었다.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과장님의 지휘 아래 Booth는 어느 새 질서를 찾고 있었다. 그제서야 내게도 Booth 안의 모습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을 해야할 지 마침내 알 수 있었다.
3. 마술같은 장표
과장님은 정말로 아무 것도 없는 빈 PPT 화면에서 장표를 만들기 시작했다. 가이드 선을 띄우고 네모와 세모, 그리고 동그라미와 같은 도구를 꺼내서는 텍스트를 쳐 넣기 시작했다. 그러면 정말로 마술처럼 장표가 완성되어 갔다.
나는 과장님의 장표를 모아서 수도 없이 분석했지만 도저히 비결을 알 수 없었다. 과장님이 만든 장표를 템플릿 삼아 만들어 봤지만 어딘가 이상할 따름이었다. 분한 마음, 그리고 죄송한 마음으로 그 장표를 가져가면 과장님은 아무 말 없이 내가 만든 장표를 수정했다. 몇 개를 툭툭 건드리니까 갑자기 그럴싸한 장표가 되었다.
나는 아직도 비결을 모른다. 그래도 시간이 나서 조금은 과장님을 흉내낼 수 있었다. 빈 장표부터 보고서를 만드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4. 완벽한 영어
회사에는 네이티브가 많았지만 부장님은 항상 중요한 미팅에 과장님을 데리고 갔다. 과장님의 영어는 뭐랄까... 한국 사람과 외국 사람을 모두 만족시키는 영어였다. 영어를 잘했다기 보다는 과장님은 언어를 잘했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멋있지도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지만, 어디서 논의가 꼬였는지를 귀신같이 집어내고는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했다. 나는 리스닝이 형편없었지만, 과장님의 영어는 우리나라 말처럼 귀에 꽂혔다. 누군가 정리되지 않은 말을 해도 과장님을 거치면 그 의미가 뚜렷해졌다.
과장님이 참여한 미팅은 매우 높은 확률로 웃으며 마무리되곤 했다.
5. 막힌 곳들이 술술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과장님은 맥가이버같았다. 문제가 발생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뚝딱뚝딱 해결해나갔다. 차가 꽉 막힌 도로에 경찰관이 투입되어 하나씩 정리하는 느낌이었다. 어떤 일을 먼저, 어떤 일을 나중에 해야 하는지를 알았고, 그 업무를 누가 하면 좋을 지를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무척이나 겸손했고, 다 해결해놓고서도 상대방에게 그 공을 돌렸다. '아니 애초에 그 사람이 문제를 일으켰던 거라고요!'라고 외치고 싶었을 정도다.
적이 많았던 부장님과는 달리, 과장님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과장님에게 뭔가 하나씩을 빚지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팀에 뭔가를 요청하러 가면 사람들은 내게 무척이나 친절하게 대했다. 왓더...!
6. 믿음 그 자체
과장님은 칭찬을 많이 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칭찬을 했다기 보다는, 내가 밤새 궁리해서 해결한 것들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시간이 지날 수록 과장님은 내게 더 많은 것들을 맡겼고, 나는 그 믿음에 부합하기 위해서 미친듯이 일을 했다. 그러면 과장님은 내게 자신이 하던 굵직한 일들을 떼어주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이 해도 되는지 의심이 가는 그런 일들이었다.
직접 해봐야 늘어요.
과장님은 항상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 이유가 있었다.
7. 수습의 대가
아무리 열심히 대비하고 노력해도 사고는 터지게 마련이다. 대비할 수 없는 사고도 있고,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 간에 과장님은 화를 내지 않았다.
사고가 터지면 과장님은 그것을 수습했다.
과장님이 내게 업무를 맡길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신뢰하기 때문이었기도 하지만, 사고가 터졌을 때 그것을 본인이 수습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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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있는 사람은 누구나 알아보는 법이다. 어느 날 과장님은 미국법인으로 떠나버렸다.
혼자 남겨진 나는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과장님이 뒤를 봐주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말이다. 좋은 사수가 신입에게 미치는 영향은 정말로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그 사수가 떠났을 때,
신입은 비로서 자신의 진짜 실력을 알고, 좌절하고, 다시 시작하게 된다.

